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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변하는 한반도정세, 새로운 '북방외교'가 필요하다

 


 

뉴스일자: 2011-09-02
 

 
글 : 평화재단
  ·러 정상회담이 6자회담의 문을 열 것인가?
 올해는 북한과 러시아가 21세기 양국관계를 규정한 ‘조․러 모스크바 선언’을 발표한 지 10돌이 되는 해이다.  ‘조․러 모스크바 선언’은 △정치, 경제, 군사, 과학기술,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쌍무적인 협조의 발전, △러시아 지원으로 건설된 기업소들에 대한 개건 실현, △북·러 철도연결사업의 본격 실현,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통일 지지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번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러시아를 방문하여 울란우데에서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6자회담의 무조건 재개와 양국의 경제협력 확대에 합의했다.
 이번 합의사항은 지난 3월 11~14일 보로다브킨 러시아 외교부 아태담당 차관 겸 6자회담 수석대표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사전 협의됐던 것과 대동소이하다. 보로다브킨 차관은 베이징에서 우다웨이 한반도사무특별대표와 사전협의를 마친 뒤 방북하여, 6자회담 재개와 관련해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발사의 잠정중단, △영변지구의 우라늄농축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 전문가들의 접근, △6자회담에서의 우라늄농축 문제 논의 등을 요구했었다.
 이번 북․러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은 6자회담이 열리는 동안에는 핵실험과 핵생산을 잠정중단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그동안 미국이 6자회담의 재개 조건으로 제시한 것은 △핵 및 미사일 시험발사 유예, △IAEA 사찰단원의 복귀 허용,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의 중단, △9·19공동성명의 이행, △남북관계 개선 등 다섯 가지이다. 이러한 미국 측의 기준으로 볼 때 이번 김 위원장의 언급은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기에는 한참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미국이 요구한 조건 가운데, 9·19공동성명의 이행은 북측이 줄곧 약속해 왔던 것이라 문제 될 것이 없고, 남북관계 개선의 경우 지난 7월 발리에서 열린 남북 비핵화회담으로 최소한의 체면치레는 하였다. 하지만 핵 및 미사일 시험발사 유예는 6자회담 기간 중에만 유효한 것이고, 우라늄농축프로그램의 중단은 논의해 보겠다는 수준이며, IAEA 사찰단원의 복귀는 언급조차 없다. 이 때문에 미 국무부는 “환영할 조치지만 불충분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여러 가지 문제 가운데 최대의 쟁점은 미국이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우라늄농축프로그램 문제이다. 한․미 양국은 당초 유엔안보리에서 북한의 UEP 문제를 논의하자는 입장이었으나, 지금은 한발 물러나 UEP 중단을 6자회담 재개의 전제조건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UEP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권에 따른 전력생산용이기 때문에 중단할 수 없으며, 다만 9·19공동성명의 "모든 핵프로그램의 포기" 약속에 따라 6자회담에서 논의할 수는 있다고 주장하였다.
 미국 측은 이러한 북측의 태도가 협상카드를 쪼개 내미는 살라미 전술이라고 보고, "한 번 산 말을 두 번 사지 않는다."며 북한의 전향적인 태도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지난 7월 말 뉴욕을 방문했던 김계관 북한외무성 제1부상은 "미국이 언제 한 번이라도 말을 산 적이 있느냐."고 반박하면서 조건 없이 6자회담을 열어 모든 문제를 논의하자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처럼 미국과 북한 양측의 입장은 평행선을 긋고 있어 수렴되기가 쉽지 않다.
 이번에 북․러 정상회담에서 보여준 6자회담 재개에 관한 러시아의 태도는 북한 측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다. 러시아는 올해 초만 해도 북한의 UEP 문제를 유엔안보리에서 다뤄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으나, 중국과 협의를 거친 뒤부터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6자회담을 먼저 열자는 것으로 입장을 바꾸었고 이번 북․러 정상회담을 통해 공식화했다. 이와 같이 북․중․러가 6자회담 재개와 관련하여 공동전선을 펴고 있어, 향후 한국과 미국이 어떠한 태도를 취할지에 따라 6자회담 재개 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 정부로서는 최근 금강산 내 남측 시설에 대한 압류조치 등과 같이 남북 간 현안이 풀리지 않고 있어 곧바로 6자회담으로 넘어가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정부는 추가적인 남북대화를 통해 6자회담의 재개 여건을 만들어나가자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천안함, 연평도 사건 등 한반도의 군사적 위기가 어느 정도 진정되면서 6자회담의 재개 문제를 마냥 미룰 수는 없게 되었다. 이제 한반도 긴장상태를 풀 수 있는 공이 우리에게 넘어온 것이다.
 
 가스관 3자협력 제안은 지정학적 세력경쟁의 신호탄   
  이번 김정일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은 여러 가지 목적이 내재되어 있지만, 무엇보다 경제적 지원이 필요한 북한과 동북아 지역에서 영향력을 키우고 싶어 하는 러시아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이다. 이번 북․러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두 번째 사항은 경제협력의 확대이다. '조․러 모스크바 선언‘에서 약속했던 양국 사이의 경제협력은 북한 기업소에 대한 개건 지원과 북․러 철도연결 사업의 두 가지였지만, 이번에는 가스관․송전관 및 철도연결의 3자협력이 강조되고 있다.
 북한은 2012년 강성대국의 대문을 여는 해를 앞두고 경제회생에 주력하고 있다. 그런데 북한의 주요 산업설비 대부분이 옛 소련제이기 때문에, 북한이 경협 차원에서 러시아제 산업설비 부품의 지원을 요청했을 가능성이 있다. 군수품의 지원은 유엔안보리 결의 1874호에 저촉되기 때문에 제외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로서는 북한이 옛 소련으로부터 빌려간 110억 달러 상당의 채무를 변제하지 않은 상태에서 선뜻 추가적인 원조 제공을 약속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반면, 러시아와 한반도 남북을 잇는 철도 및 가스관 부설, 송전선 건설 등 3자 경제협조 계획들은 사정이 좀 다르다. 이 계획들은 이미 지난 3월 보로다브킨 차관의 방북 때 남북관계의 개선을 적극 돕는다는 명분으로 러시아가 제안했던 것이다. 이번 북․러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이 러시아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모양새를 했고, 메드베데프 대통령도 “(북한 또는 한국과의) 양자협력의 구체적인 요건을 검토하는 특별위원회를 러시아 정부 산하에 설치"하도록 하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러시아는 가스관 관통과 철도 연결을 통해 남북한을 아우르는 한반도 전체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아이훈조약으로 극동지방에 진출한 후 러시아는 부동항을 찾아 남하하여 1896년 동청철도 부설권의 확보와 랴오둥반도 남단부(다롄, 뤼순)의 조차로 만주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크게 확대했다. 만주국의 건국으로 일본과 충돌할 것을 우려해 1935년 한때 만주에서 철수했으나,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다시 만주에 진주했다가 1949년 중국공산당 정부가 수립되면서 완전히 손을 뗐다.
 러시아의 한반도 영향력은 1896년 고종의 주한 러시아 공사관 피신(아관파천) 직후에 극에 달했다가 1904~1905년 러일전쟁에서 지면서 급속히 소멸됐다. 하지만 1945년 8월 소련군의 북한지역 진주로 한반도 북부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했고, 그 이후에도 다소의 부침은 있었지만 북한에 대한 영향력은 지속되어 왔다. 탈냉전 직후 국내문제에 휘말리면서 러시아의 한반도 영향력은 급속히 쇠락했지만, 현재 라진항 3호 부두의 50년 사용권을 확보한 상태이다.
 이제 러시아는 2012년 정권교체기를 맞이하여 북한을 넘어 한반도 전체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으로서는 러시아에 일방적으로 경제지원을 요청하기보다 이러한 러시아의 이해관계를 최대한 활용해 중국에 대한 일방적인 경제의존을 완화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이번 김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에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크게 걸려 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북․러 정상회담을 앞둔 러시아의 대북 식량지원 약속이다. 러시아는 올해 초 세계식량기구(WFP)를 통해 대북 식량지원의 규모를 500만 달러까지 늘렸을 뿐 아니라, 김 위원장의 방러 직전에 밀가루 5만 톤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밀가루의 국제시세가 톤당 335달러(2011년 2월 말)인 점을 감안하면, 러시아는 김 위원장의 방러를 위해 2000만 달러가 넘는 식량원조를 제공한 셈이다.
 러시아는 북한을 설득해 남북한을 지나는 가스관의 연결을 어떻게든 관철시키고자 하고 있다. 이번 가스관 및 송전선 연결사업은 동북아의 지정학적 구도를 크게 뒤바꿔놓을 수 있는 사업이다. 가스관의 길이는 1000㎞에 달하며, 이 가운데 700㎞는 북한지역을 통과하게 된다. 송전선은 가스관이 건설될 때 함께 매설된다. 이 사업은 천문학적인 비용이 필요한 초대형 프로젝트로서 북․러 양국 차원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미국으로서도 남․북․러의 가스관 및 송전선 연결사업은 북한의 핵문제, 전략방위적 판단, 미국 석유․가스 업계의 이해관계 등을 고려할 때 민감하게 생각해야 할 사업이다. 일본도 러시아의 한반도 영향력 확대를 그냥 눈뜨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처럼 북한을 놓고 중국과 러시아가 서로 지정학적 경쟁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미국과 일본도 이 경쟁에 뛰어들 채비를 하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이 같은 경쟁양상은 한국전쟁이나 북핵문제와 달리 주변 강대국들에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잘만 하면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플러스섬 게임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번 프로젝트에 대해 동북아 역내 모든 국가의 이해관계가 일치할 수 있으며, 그 결과에 따라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가져올 수도 있다.
 
 중장기 전략으로 새로운 북방외교가 필요 
  이번 북․러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두 가지 사항은 우리 정부에 '트로이의 목마'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조건 없는 6자회담 재개'는 자칫 한․미 양국이 주장해 왔던 UEP 문제를 흐지부지시키고 일련의 서해사태에 대한 북한 측 책임을 묻지 못하게 할지도 모른다. 또한 '가스관․송전관․철도연결의 3자 협력'은 향후 에너지 문제에서 우리가 러시아와 북한에 좌지우지될 위험성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2007년 석유통과세를 둘러싼 마찰로 벨라루스가 자국을 경유하여 폴란드․독일로 가는 드루즈바 송유관을 차단하는 조치를 취한 바 있고, 2006년과 2009년에는 천연가스 가격을 둘러싸고 우크라이나를 거쳐 중동부 및 서부 유럽으로 가는 가스관을 러시아가 차단하여 외교무기로 사용한 전례가 있다.
 과거 북한이 남한에 이와 비슷한 조치를 취한 적이 있다. 1948년 5월 14일자로 당시 북조선인민위원회는 남한 주둔 미군사령부가 전기요금을 미납한다는 이유로 송전을 중단하였다. 당시 한반도의 발전시설은 일제의 중국 침략 병참기지화 정책으로 90% 이상이 북한에 집중되어 있었고, 남한의 북한전력 의존율은 60~70%에 달했기 때문에 송전 중단 조치는 남한사회에 엄청난 혼란을 가져왔다. 결국 남한에서는 전기를 시간제나 구간제로 공급하는 등 궁여지책으로 버틸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인지 정부는 북․러 정상회담에서 거론된 남․북․러 3국 가스관 연결사업에 대해 "남북 간의 신뢰 조성이 우선"이라며 신중한 태도를 취하였다. 실제로 가스관․송전관 및 철도연결 사업에는 많은 시간과 돈이 소요되기 때문에 현재와 같이 악화된 남북관계에서는 실현 가능성이 낮다. 특히 5·24조치로 남북경협이 전면적으로 중단된 상황에서는 이 같은 대형프로젝트를 선뜻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현재의 남북관계만 탓하며 우리 정부가 손을 놓고 있기에는 한반도 주변정세의 변화 속도가 매우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이번 북․러 정상회담은 2009년 하반기 북․중 관계의 완전회복에 이어 북․러 관계의 완전회복을 상징하며, 북한이 유엔안보리 제재에도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지 않고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북한은 유엔안보리 결의 1874호에도 불구하고 외교적으로는 국제적인 고립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다. 미국도 민간교류를 허용했을 뿐 아니라 90만 달러의 구호품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이제 남은 것은 한국이 취하고 있는 5·24조치뿐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정세 변화가 중국이나 러시아의 전략에 따른 것인지, 아니면 북한의 이니셔티브에 의한 것인지는 좀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우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한반도 주변정세의 변동 속에서 한국의 역할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지난 8월 15일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서는 북한 어린이와 자연재해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언급하는 것 외에 남북관계를 끌고 갈 대전략이 제시되지 않았다. 정부 당국자는 지금이 말보다 행동이 중요한 시기라고 해명했지만, 어쩐지 '전략 부재'에 대한 변명으로만 들린다.
 이제라도 정부는 변화된 북․중 및 북․러 관계를 아우르는 새로운 지정학적 전략, 새로운 북방정책을 수립하여 추진할 필요가 있다. 일찌기 노태우 정부는 탈냉전기의 도래에 대비하여 7·7선언을 통해 북방정책을 내놓았다. 그 결과, 한국은 1989년 처음으로 사회주의국가인 헝가리와 수교하고, 이를 출발점으로 소련·중국 등과 잇달아 국교를 정상화하는 외교적 성과를 거둔 바 있다. 그리고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하고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이라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였다.
  머지않아 통일부 장관을 교체한다는 소식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통일부 장관의 교체가 북한에 ‘잘못된 신호’를 보내지 않을 만큼 정부의 대북정책이 전환될 필요가 생겼다는 의미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장관 교체나 5·24조치의 철회와 같은 근시안적 대책보다 중요한 것은 한반도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지정학적 변동에 대한 중장기 전략을 마련하는 일이다. 이제라도 새로운 북방정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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