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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SA People Power 1, 민중의 힘!

 


 

뉴스일자: 2011-02-25
 

EDSA People Power 1, 민중의 힘!

‘EDSA 혁명으로 불리우는 피플파워가 25주년을 맞이해 에드사(EDSA)도로에는 대대적인 행사가 치뤄진다.

피플파워는 말 그대로 민중의 힘! 필리핀 피플파워는 민주의 힘으로 권력을 전복시킨 가장 좋은 예로 필리핀 국민들의 애국심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본보기가 되었다.

 

피플파워

 

에드사혁명 (EDSA Revolution)으로 유명한 피플파워는 코라존 아키노(Corazon Aquino)가 국민들을 이끌고 독재자였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에 대항해 일어난 무혈혁명을 말한다. 이 혁명은 필리핀의 민주주의를 재정착시켰고 국민들에게 애국심을 일깨우는 한편 국가를 하나로 묶는 원동력이 됐다. 1986 221일부터 25일까지 5일 동안 수백만 명의 필리핀 국민들은 올티가스 애비뉴 (Ortigas Ave) EDSA에 모여 계엄령으로 지난 20년간 필리핀을 독재해 온 마르코스를 타도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외국인들에게는 유혈시위에 근접했던 EDSA 혁명이 단순한 역사적 승리로 평가되고 있으나 필리핀 사람들에게 수십 년에 걸친 부끄러움을 털어내는 몸부림, 즉 기나긴 시간 동안의 어두운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으로 해석된다. 이때 처음으로 가난한 사람과 부자, 공산당 지지자들과 교회 지도자들 등 절대 다른 이유로는 만나지 않았던 사람들이 국가와 국민을 구하자는 한가지 이유만으로 모였다는 깊은 의미가 있기도 하다. 이 혁명에 앞서 일어난 마르코스의 계엄령 발표와 최대 경쟁자였던 야당지도자 아키노의 시해를 포함한 일연의 사건이 시발점이 되기는 했지만 정작 사람들을 EDSA로 모이게 한 것은 1986년 대통령선거가 모두 부정으로 밝혀 지면서였다. 혁명의 절정은 아키노가 정권을 이양 받고 마르코스와 그의 아내 이멜다가 필리핀을 떠나던 순간이었다. 평화적으로 마친 EDSA 혁명은 두 가지 업적을 남겼다. 첫째는 필리핀 군의 양분화를 막았고, 둘째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1986년 대통령선거에서 아키노에 패하고 권좌에서 물러났다는 점이다. 이 혁명 이후 EDSA에는 역사적인 피플파워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기념비가 세워졌다.

 

등장인물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페르디난드 E. 마르코스(Ferdinand E. Marcos) 1917년 9월 11 마리아노 마르코스와 호세파 에드랄린사이의 4자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65년 마르코스는 대통령선거에서 당시 현직 대통령 디오스다도 마카파갈(Diosdado Macapagal)에 승리하고 대통령에 취임한다. 1969년 자유당의 상원의원 세리오 오스메냐 (Sergio Osmeña)를 현저한 차이로 누르고 재선되며 몇 번의 헌법개정을 통해 1986년까지 자신의 자리를 궂힌다. 마르코스 대통령과 영부인 이멜다는 국가 총 생간의 3배에 달하는 1억 달러의 돈을 착복해 세계 최고의 도둑으로 기네스북에 오르는 불명예를 안기도 한다.

 

코라존 ‘코리’ 아키노

마리아 코라존 수물롱 코후앙코 (Maria Corazón Sumulong Cojuangco) 1933년 1월 25 중국계 필리핀인 아버지와 필리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고 1955년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 (Benigno Ninoy Aquino)와 결혼한다. 니노이 아키노는 주지사를 거쳐 상원의원에 오르고 마르코스의 정권에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 받은 후 국외로 추방된다. 코리는 1980년 남편과 함께 추방 길에 오른다. 니노이가 시해된 후 코리는 정치에 입문해 Laban당의 대표로써 1986년 마르코스에 대항해 대통령에 출마한다. 코리는 이 혁명의 ‘목소리’로 추앙된다.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

1932 11 27 딸락(Tarlac)의 콘셉시온(Concepción)에서 태어나 1955 22세의 나이로 시장에 당선된다. 같은 해 코라존 코후앙코와 결혼하고 1961년 딸락의 주지사가 된 후, 1966년 자유당의 사무총장 자리를 거머쥐며 1967년에 상원의원에 당선된다. 아키노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독재시절 야당을 이끈 대표인물이다. 1972년 마르코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아키노는 살인과 전복혐의로 수감되고 1977년 사형을 선고 받는다. 이는 다시 국외추방으로 감형되고 1980년 미국에서의 치료를 위해 떠나게 된다. 1983년 8월 21 추방에서 돌아온 마르코스는 마닐라 국제공항에서 시해되고 부인인 코라존 아키노는 야당의 지도자로, 결국에는 마르코스를 몰아내고 대통령직을 이어가게 된다.

 

후안 폰세 엔릴레

서출로 태어나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고 세계2차 대전에서 게릴라로써 맹활약을 했던 엔릴레는 당시 국방위원장 직을 맡고 있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필리핀 군의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83년 베니그노 아키노가 피살되자 마르코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혁명에 가담했다. 피델 V. 라모스 (Fidel V. Ramos)와 함께 군의 힘으로써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에 대항해 일어난 혁명의 원동력을 제공했다.

 

피델 라모스 육군 중장

당시 라모스는 필리핀군의 사령관과 필리핀 방위대(현 필리핀 경찰)의 수석을 맡고 있었지만 나중에는 후안 폰세 엔릴레와 혁명에 가담하게 되고 결국에는 코라존 아키노의 전폭적인 지지와 함께 1992 12번째 대통령에 선출된다.

 

그레고리오 ‘그링고’ 호나산

호나산은 젊은 군인으로 후안 폰세 엔릴레가 혁명에 가담했을 때 안보책임자로 있었다. 이때 자신의 임무를 훌륭하게 소화해 내고 그 대가로 수많은 메달과 더불어 신임을 더게 되었다.

 

하이메 칼디날 신

신 추기경은 필리핀 가톨릭 계의 의견을 대변했다. 그는 신이 혁명의 편에 있다고 설득하는데 성공하고 가톨릭 신도들을 모아 마르코스의 독재에 항거하는 세력으로 이끌어 냈다.

 

마르코스 시절: 시작

1969년 마르코스가 재선에 성공하자 공산당과 모슬렘 분리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매스컴을 통해 알리기 시작한다. 이 사건들과 더불어 노동자들의 파업과 학생들의 시위는 마르코스가 계엄령을 선포하는 구실을 제공한다.

 

계엄령

서서히 고개를 드는 무법질서와 공산당의 폭동 위협을 빌미로 1972 921일 계엄령을 발표한다. 이 계엄령아래 언론의 자유는 폐지되고 국민들의 자유는 박탈되며 의회와 미디어 기관은 문을 닫음과 함께 상원의원 베니그노 아키노를 포함한 야당 지도자들과 군 행동주의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1973년 이후 적법한 이유로 임기를 연장할 수 없게 된 마르코스는 반대파 정치인들을 감옥에 넣은 후 헌법을 고쳐 의회제로 바꾸는 등의 방법을 동원해 1973년 이후에도 정권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다. 헌법개정이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을 감지한 마르코스는 시민의회를 결성할 것을 지시하고 변칙적으로 헌법을 개정할 방법을 모색한다. 새 헌법이 완전히 시행되기도 전부터 마르코스는 계엄령을 마음대로 늘릴 수 있는 법 조항을 포함해 자신이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수상의 자리에 이르는 것 등 수많은 수정을 거치게 된다.

 

암살

마르코스의 최대 적이었던 야당 대표 니노이 아키노가 1983년 긴 추방 생활을 마치고 필리핀에 돌아오는 길에 암살된 후 소규모의 반정부 집회는 대규모로 변하고 메트로 마닐라의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여기에 가담하게 된다. 중산층이 가담하고, 빈민층이 여기에 동참했으며 마르코스에 진저리가 난 비즈니스맨들도 혁명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아키노의 암살은 점점 약해져 가고 있는 마르코스 정권의 나약함을 그대로 드러냄과 함께 당시 마르코스는 잦은 질병으로 인해 자리를 비웠고 대신들이 나라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상황에서 아키노를 지지하던 사람들의 폭동에 기름을 끼얹는 결과를 초래했다.

 

국민들의 불화

아키노의 암살로 빚어진 국민들의 불화는 미국의 관심을 불러들였고 이로 인해 이멜다의 화려했던 생활과 페르디난드의 독재정권은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니노이의 암살 이후 1986 2월에 치르게 된 대통령 선거로 국가의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코라존 아키노를 지지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름이 선거자 명부에서 누군가에 의해 지워졌다고 주장했다. 그런 사이 의회는 마르코스를 선거의 승자로 발표했지만 선거부정은 너무나 뻔했다. 야당은 아키노의 미망인 코라존 아키노와 공화당의 살바도르 라우렐 (Salvador Laurel) 아래로 모아지게 됐다. 선거는 마르코스를 지지하던 사람들의 부정에 의해 보기 흉하게 변해있었다. 필리핀 가톨릭 지도자들은 선거를 규탄했다. 미국 정부의 대리인들을 포함한 국제적인 업자버들은 선거결과를 부정했고 1986 225, 급기야 마르코스는 그를 몰아내고 코라존 아키노를 그 자리에 올리려는 민간인과 군인들 앞에서 필리핀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필리핀은 이미 마르코스가 권좌에 오르기 이전보다 훨씬 가난한 나라로 전락해 있었다.

 

5일간의 용기: 피플파워

망명

혁명은 두 명의 군대지휘관이 마르코스에게 등을 돌리면서 촉발됐다. 1986년 2월 22 토요일 오후 6 45, 후안 폰세 엔릴레 국방위원장과 사령관 피델 라모스 중장이 기자회견에서 자신들이 대통령 선거에서 부정을 저지를 마르코스를 더 이상 지지하지 않을 것을 공식화한다. 이 자리에서 그들은 코라존 아키노가 진정한 대통령 선거의 승자임을 밝히고 뒤를 이어 라모스가 이끄는 캠프 크라메와 엔릴레가 이끄는 캠프 아기날도 두 개의 단체로 나뉘어 부대 앞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얼마 남지 않은 군대와 함께 파비안 베르 장군이 이끄는 마르코스 추종자들의 공격에 대비한다.

 

가톨릭 교회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유일하게 정부가 쥐고 있지 않던 라이오 버리타스를 통해 하이메 신 추기경은 국민들에 캠프 크라메와 캠프 아기날도 앞 EDSA에 모여 이들에게 지지를 보여줄 것을 간청하자 수많은 사람들과 특히 신부와 수녀들이 에드사로 모여들었다.

 

피플파워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EDSA에 모여들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기도만을 지참하고 왔고 다른 부류는 성모상을 지참하고 이 장소에 왔다. 사실 그 자리는 모든 가족이 모인 축제 분위기였다. 연예인들은 관중을 즐겁게 했고 신부와 수녀는 밤샘 기도집회를 이끌었다. 사람들은 바리케이드를 치고 모래주머니, 나무, 차량 등을 이용해 EDSA의 여러 부분을 막고 교차로를 차단하는 한편 라디오 베리타스를 청취하면서 1980년도부터 야당의 대표 곡이 돼버린 바얀 꼬 (나의 땅)’를 함께 불렀다. 또한 싸우자는 의미의 ‘Laban’ L자를 엄지와 검지들 들어 만들며 저항의 의미를 천명했다. 223일 점심이 막 지날 무렵 엔릴레와 라모스는 양측의 군대를 합병하기로 결정했다. 엔릴레는 군중들의 환호 속에 캠프 아기날도를 나와 EDSA를 가로질러 캠프 크라메로 향했다. 오후가 중간으로 지날 때쯤 라디오 베리타스는 해군이 탱크를 이끌고 북쪽과 남쪽에서 공격해 오고 있다고 전했다. 아르테미오 타디아가 준장이 이끌던 해군의 탱크와 무장 트럭이 산발적으로 공격을 위해 진행해 오던 중 캠프에서 약 2킬로미터 떨어진 오르티가스 애비뉴에서 수 천명에 이르는 사람들에 의해 저지를 당한다. 수녀들은 묵주를 들고 탱크 앞 바닥에 무릎을 꿇고 뒤에는 사람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공격해 오는 군인들을 가로막았다. 타디아는 시민들에게 물러날 것을 요구하면서 겁을 주었지만 결국에는 한발의 발포도 없이 후퇴해야 했다.

 

채널 4

그때쯤 라디오 베리타스의 준 키슬리는 마르코스가 말라카냥 궁을 떠났다는 뉴스를 접하고 EDSA에 있는 사람들에게 뉴스를 전했다. 군중들은 축제분위기로 들뜨기 시작했고 라모스와 엔릴레도 캠프에서 나와 군중들과 기쁨을 같이했지만 마르코스가 정부 소유의 방송국인 채널 4에 모습을 들어내 자신은 절대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축제분위기는 찬물이 끼얹어졌다. 그러나 이 방송이 나가던 도중 갑자기 방송이 중단됐다. 마리아노 산티아고(Mariano Santiago) 대령이 이끌던 군대가 방송국을 장악한 것이다. 방송국은 정오가 조금 지나면서 재가동됐지만 이번에는 여러분을 위한 채널 4 방송국입니다라고 하면서 방송을 재개했다. 이때 EDSA에는 2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취임식

225() 오전 7시경 현정부를 지지하던 사람들과 개혁을 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소한 분쟁일 일어났다. 저격수가 정부 소유의 채널 9 방송국 타워와 채널 4 방송국 사이의 개혁주의자들에게 저격을 가했다. 한 무리의 개혁파 군인들이 방송국으로 달려들어 상황을 진정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코리 아키노는 캠프 크라메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그린힐의 클럽 필리피노에서 간단한 예식과 함께 대통령에 취임에 선서했다. 아키노는 클라우디오 티항키 (Claudio Teehankee) 상임법관 앞에서 라우렐 부통령과 함께 선서했고 니노이 아키노의 어머니인 오로라 아키노 (Aurora Aquino) 여사가 이때 성경책을 들고 있었으며 당시 대령으로 승진된 라모스와 엔릴레를 포함한 다수의 정치인이 참석했다. 클럽 필리피노 밖을 기점으로 EDSA로 이어지는 길에는 2백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행사를 축하하고 바얀 꼬를 부르며 아키노의 서약에 동참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아키노가 선거운동을 하면서 사용했던 노랑색 옷을 입었다. 한 시간 후, 마르코스는 말라카냥 궁에서 자신의 취임선서를 거행했다. 수백 명의 지지자들이 여기에 모여 마르코스, 마르코스, 우리는 아직 마르코스를 지지한다를 외쳤다. 말라카냥 궁의 발코니에서는 마르코스가 필리핀의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장면이 다른 정부소유의 텔레비전을 통해 방송됐지만 초대되었던 외국의 인사들은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것은 힘을 잃은 왕이 취임하는 진풍경을 낳았다. 이멜다 마르코스는 자신들의 노래 당신 때문에를 다시 불렀다. 취임식이 끝나고 마르코스와 측근들은 서둘러 궁을 빠져나갔다. 이 장면은 이미 반군이 방송국을 장악했으므로 방송되지 않았다. 수천 명의 군중은 말라카냥 궁에서 백여 미터 떨어진 멘디올라 (Mendiola)에 설치된 바리케이드에 집결해 있었다. 이들은 현정부를 지지하던 군인들에 의해 말라카냥 궁의 진입이 저지당하고 있는 상태였고 화가 났지만 이를 이끌던 신부들의 침착 하라는 간곡한 권유에 유혈 폭동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마르코스가 도망하다

마르코스는 나중에 미국의 폴 렉셀트 상원의원을 통해 백악관의 자문을 구하게 된다. 렉셀트는 마르코스에게 내려 설 것을 충고하고 그날 오후 마르코스는 엔릴레에게 자신과 가족의 안전한 망명을 요청한다. 마침내 오후 9, 마르코스 일가는 4대의 미군 헬리콥터에 나뉘어 팜팡가의 클락 공군기지와 괌을 통해 하와이에 정착하게 된다. 마르코스가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많은 사람들은 기뻐하며 춤을 추웠다. 멘디올라에 모여 있던 시위대들은 수십 년간 국민들에게 굳게 닫혀있던 말라카냥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몇몇 화가 난 사람들은 시설물을 훼손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필리핀의 역사를 송두리째 바꿔버린 역사의 현장을 묵묵히 지켜봤다. 전세계 사람들은 필리핀 국민들과 함께 기뻐하며 축하의 메시지를 전했다. 하룻밤 사이에 필리핀은 여러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CBS의 앵커 밥 사이몬 (Bob Simon)우리 미국인이 필리핀에 민주주의를 가르쳤다고 생각했지만 필리핀 사람들은 오늘밤 전 세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혁명 이후

어떻게 수백 명의 사람들이 20년이 넘은 독재주의를 몇 방울의 피로 흔들리게 했는지는 아직도 논쟁의 대상이다. 혹자는 이는 기도의 힘이 이끌어낸 신이 내린 기적이고 성모 마리아가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고 믿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은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동요하지 않고 끝까지 랄리를 이끌고 간 필리핀 사람들의 특성이라고 본다.  1986년의 피플파워 혁명은 아마 수백만 명의 민간인이 억제와 테러의 모델이었던 군대를 도와 성공적으로 이끈 사건일 것이다. 코라존 아키노의 집권은 필리핀 민주주의의 회복을 의미했다. 아키노는 즉시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정부를 꾸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이끈 정부는 마르코스가 무자비하게 짓밟아버린 민간인에게 자유를 돌려주는 과도기적인 역할을 충분히 했다. 의회는 해체되고 사람들은 공직으로 복귀되었다. 새로 개정된 헌법은 계엄령에 대한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모슬렘 민다나오 등 자치권을 인정하는 한편 대통령제를 다시 부활시키고 양원제를 재도입했다. 아키노의 정권아래 필리핀의 민주주의가 성숙해 지는 한편 국민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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